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의 관객 모독

나는 친구와 밥을 먹으면서 사랑을 비를 타고를 본다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는 그 작품은 아주 좋은 작품이라고 자신은 감동했다고 말했다. 나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친구를 떠올렸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말했다. 방금 사랑을 비를 타고봤어. 그녀는 대답했다. 그건 아주 좋은 작품이야. 나는 말했다. 아니야, 아주 형편없는 작품이야. 그녀는 말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나는 말했다. 90분은 너무 길어. 고문당하는 시간으론 너무 길어. 그녀는 웃었다. 그녀는 대답했다. 왜 끝까지 봤지? 나는 말했다.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어.

그렇다. 좋은 작품이었던 시절도 있다고 했다. 그건 아마 지금 작품으로 다시 만들어지기 이전, 그것은 한국 창작 뮤지컬 역사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형제가 나란히 앉아 피아노를 치는 장면에 대해 나는 또 얼마나 들었는가. 남경주와 최정원과 오만석 등의 한국 뮤지컬 명인들의 연기는 또 얼마나 섬세했을까. 그 시절은 전설처럼 아름다웠지만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비를 타고는 제목만 유지한 채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과거의 영광을 찾을 수 없다.

나와 내 친구는 좋은 예술 작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니 우리는 예술 작품만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결국 진정성에 대한 대화였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애티튜드에 대한 대화였다. 그런 면에서 나는 불쾌함을 토로했다. 나는 뮤지컬을 제작한 이들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다. 나는 피로했으며, 화가 났다.

이유는 명확했다. 그 뮤지컬은 못 만든 뮤지컬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기만하는 뮤지컬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음악에 대해 말할 순 없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기만 할 뿐, 전문적인 지식과 감식안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극작에 대해, 연기에 대해, 연출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성의에 대해, 기만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나는 제작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나는 할 수 없었다. 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두 가지 층위의 이야기는 긴밀하게 연결되기는커녕 제 각각의 이야기조차 완성도가 떨어졌다. 가령 주인공들의 사랑은 왜 이전의 복선과 정서의 축적이 없이 갑자기 시작되는가. 내가 원하는 건 순문학적 디테일이 아니다. 서정시적인 물질화까지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TV 드라마에서도 흔히 나오는 사랑의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흔한 장치들이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우연히 여자가 차린 음식을 먹고 여성스러움을 발견한다든지, 혹은 예상치 못한 스킨십 후에 상대가 이성으로 보이게 된다든지.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런 요소는 일절 없다. 서로에게 남녀의 호감은커녕 인간적인 호감도 없던, 아니 얼마간의 경멸과 경계를 내포하고 있던 둘의 관계는 느닷없이 사랑으로 발전한다. 나도 연애를 해봤다. 다른 관객들도 해봤다. 우리도 알고 있다. 때로 어떤 사랑은 아무런 계기가 없는 것처럼 시작된다. 그것은 마치 디지털적 명멸처럼 어느 순간 나타난다. 우린 팩트로써 알고 있다. 하지만 내러티브 예술에서의 핍진성은 다르다. 그것은 극 내부에서 획득해야만 한다. 반드시 감상자에게 자신들의 감정 변화를 납득할 수 있는 단서를 던져줘야 한다. 감상자들은 언제나 두 주인공의 사랑을 믿고 싶기 때문에, 그럴 적극적인 마음 상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조악하고 클리쉐적인 단서를 던져준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배려가 없다. 나를 비롯해 몇몇 관객들이 그들이 갑자기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괜히 키득거린 게 아니다.

또 하나의 핵심 서사, 즉 애인을 찾아온 귀신 서사 또한 잘 짜여 있지 않다. 이것도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주 재능 없는 문창과 학생이라 할지라도 죽은 애인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짜낼 때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서스펜스를 단계적으로 배치하려 할 것이다. 당연한 게 아닌가. 그게 일반적인 현대의 대중 내러티브 구조다. 만약 대단한 창의력을 발휘한 작품을 만들거나, 비대중적이고 메타적인 서사를 기획했다면 다르지만, 이 작품처럼 대중적인 작품에서는 뻔한 구조를 차용하기만 해도 좋았다. 그것은 이렇다.

작은 단서로 인한 의혹 발생 -> 작은 단서들이 취합되며 의혹은 서스펜스를 발생시킴 > 서스펜스는 새로운 감정과 새로운 상황을 끌고 들어옴 -> 극에 달한 서스펜스와 감정 -> 해소

  사랑은 비를 타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떤 긴장도 없었다. 이 극에서 귀신의 역할은 두 주인공이 만나는 계기를 만드는 매개체였을 뿐이다. 어쩌면 둘의 사랑의 계기까지도 귀신이 해준 거라고 극작가와 연출은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다. 당신들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일반적으로 귀신이 영매를(이 작품에서는 남자 주인공) 보내는 서사의 핵심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매 서사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발생하는 건 영매를 통해 살아 있는 사람이 기시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시감의 반복은 점층적으로 진행되고 어느새 그것은 과거의 감정을 일깨우게 된다. 이때 영매가 극의 전면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그 기시감의 대상이 영매여야 한다. , 기본적으로 이 세상에 귀신은 없다란 과학적 사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감정을 쏟았던 대상의 무엇인가를 연상하게 하는 영매. 이 두 가지가 핵심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여주인공은 귀신이 자신의 곁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가 하는 말을 영매가 전달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때 과연 여주인공이 영매를 사랑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더군다나 이 작품처럼 영매-남주인공과 여주인공 사이의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는 에피소드가 전무한 채, 전적으로 귀신과의 기시감만을 드러내는 에피소드가 나열됐을 경우에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극에서 가장 짜증이 났던 부분은 극작이 아니었다. 한국 창작극 중에서 형편없는 극작으로도 창피한 줄 모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난 이미 그들의 뻔뻔함에 질릴 대로 질려 있었다. 내가 짜증 난 부분은 이거다. 왜 그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배우들의 끼부림을 통해 극복하려고 하는가이다.

이 작품에서 제대로 연기를 한 배우가 하나도 없었으며, 그들의 연기는 형편없다 못해 끔찍한 수준이었으며, 보는 내내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심지어 훌륭한 연기를 한 것도 아닌데, 강아지 역을 맡은 배우가 대배우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마 누군가 그 극을 보고 그에게 연기 잘했다고 한다면 그 배우는 곧이곧대로 듣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누린 반사이익일 얼마나 컸는지 안다면 말이다.

이 정도에서 끝났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불쾌감까지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전술했듯이 이 극에서 배우들이 심각하게 끼를 부린다고 느꼈다. 끼를 부린다는 관용어구의 모호함으로 표현해서 미안하지만, 이 이상의 표현이 또 있을까 싶다. 난 그래서 등장인물 중 대부분이 아이돌인 줄 알았다. 아이돌 특유의 그 철없는 끼부림이 있지 않은가. 자신이 참여하는 작품(그것이 노래든, 드라마든, 극이든, 예능이든)에서 자신들의 노력 부족과 재능 부족을 끼부림을 통해 극복하려는 경우. 보는 사람이 멍해질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귀여운 제스쳐라도 그들의 팬들은 꺅꺅 소리를 지를 것이다. 이 작품에서의 배우들이 딱 그랬다. 그래서 나는 이들은 내가 모르는 아이돌들이라고 생각하며 작품을 봤던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볼까? AB에게 깊은 호감을 품고 있다. 이때 BA의 호감을 사기 위해 작업 C를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A가 자신에게 가진 호감에 반응하기만 해도 A는 열광할 것이기 때문이다. , 어린아이들이 자신들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일가친척들 앞에서 별 재주를 부리지 않고 발을 동동 구르기만 해도 환호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난 그들의 연기가 그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린 성인이다. 성인 관객이란 아주 냉정한 법이고, 우린 그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사랑스러운 조카의 찡긋거리는 눈 장난이나 보려고 앉아 있는 게 아니다. 그따위 팬클럽 앞에서나 할 법한 재치도 센스도 없는 무작정의 귀여운 척을 보려고 앉아 있는 게 아니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건 그들의 의지가 아닐 수 있다. 연출이 시킨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왜 그래야만 했을까. 애초에 연기를 무지막지할 정도로 못해서 그런 게 아닐까? 애초에 배우들의 한계가 명확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 한계가 명확한 이유는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닐까?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결론까지가 너무 성급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남자주인공이 핸드 싱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의 아마추어적인 절박함에 화가 났다. 프로의 절박함은 그것과 다르다. 연기를 못한다면 다른 부분이라도, 그러니까 반복해서 연습하면 나아질 수 있는 그런 단순 노동에 가까운 연기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 그것도 못했다는 건 뻔할 뻔자 아닌가.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작품의 극작가도, 연출가도, 배우도 다 성의가 없구나. 그들이 놓치는 부분들을 난 재능의 부재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놓친 부분들은 고급한 예술적인 부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화책이나 TV드라마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플롯을 놓쳤고, 평범한 연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배우를 섭외하지 않았으며(대학로에 적당한 정도의 연기라도 할 수 있는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의 모자란 연기를 끼로 채우게 했고, 자신들이 연기할 배역을 연구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단순 반복만으로도 향상될 수 있는 연기적 부분을 소홀히 했다.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언제나 이런 형편없는 공연에 들어간 비용을 떠올리고 만다. 45000. 데이트로 생각한다면 두 명, 90000. 저들은 구만 원이 우스운 걸까, 아니면 관객의 수준이 우스운 걸까? 자신들이 적당히 술 마시고 놀고 하면서도 작품을 완성시키면 바보처럼 턱턱 돈을 내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난 올해 본 연극 중에 ‘S다이어리가 가장 연극 같지도 않은 연극, 극작이 가장 형편없으며 의식도 없고 무식한 연극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볼 때 사랑은 비를 타고는 그보다 더하다. 적어도 S다이어리는 배우들이 개인 기량으로 관객들을 웃기기라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제안하고 싶다. ‘사랑은 비를 타고의 제작자들은 객석에 앉아서 관객들과 함께 극을 감상해 보라고. 배우들이 어색한 표정으로 끼를 부릴 때마다 객석이 얼마나 싸늘해지는지 지켜보라고. 남녀 주인공이 사랑의 감정을 노래할 때 무표정하게 조소를 날리는 관객이 얼마나 많은지 지켜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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