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복수, 가문의 비극

  아이스퀼로스의 희곡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을 보자. 오레스테스는 고민한다. 자기 아버지 아가멤논을 죽인 자들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 하지만 원수가 누구인가. 자기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와 그녀의 정부(아이기스토스)가 아닌가. 그러자 아폴로는 소리친다. 


“가라, 너는 복수를 해야만 한다. 그것은 미덕도 아니고, 너의 선택도 아니다. 그것은 의무다.

의무를 행하지 않는 것은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다. 너는 벌을 받을 것이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지 않는 자에게 준비된 것은 신의 징벌이다, 가라!” 


  그러자 오레스테스는 묻는다. 


  “그렇지만, 그녀는 제 어머니입니다. 친족살해 역시 이치를 거스르는 것.

저는 분명 복수의 여신들에게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 역시 큰 죄입니다.”




  오레스테스는 두려움에 몸을 떤다. 그에게 남은 것은 복수하지 않고 신의 벌을 받는 것과 복수하고 신의 벌을 받는 것, 두 가지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고통이다. 고통의 본질이다. 선택은 허위다. 어떤 선택도 고통이다. 그러므로 운명은 오직 하나다. 고통. 고통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그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피다. 붉은 피 안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 그것은 고통이란 이름의 미래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분명한 사실은 어제는 태어났고 내일은 죽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죽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태어났는지는 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씨가 만나 이 세상에 나왔다는 한 가지는 안다. 그것이 운명이다. 그것이 고통이다. 가족이 고통이다. 가족만이 운명이다. 


  오레스테스의 아버지 아가멤논은 아이기스토스에게 살해당한다. 아이기스토스의 아버지 티에스테스는 아가멤논에게 쫓겨나 비참하게 죽는다. 티에스테스는 아이기스토스를 시켜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를 죽인다. 아트레우스는 자기 동생 티에스테스의 자식들을 삶아서 동생에게 먹인다.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는 어머니의 명에 따라 이복형제를 죽인다. 아트레우스의 티에스테스의 아버지는 펠롭스다. 펠롭스는 자신의 아버지 탄탈로스에 의해 죽임을 당해 요리로 만들어진다. 신들은 펠롭스를 되살려낸다. 이게 이 가문의 운명이다. 이들의 운명, 거스를 수 없는 그 중력은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서 자행된다. 만약 아트레우스가 다른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그는 티에스테스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기스토스가 다른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자기 사촌인 아가멤논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이기스토스는 자기 조카인 오레스테스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오레스테스는 복수의 여신들에게 고통스럽게 쫓겨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가족에게 매달리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몸에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프로세스가 있는 것이 아닌가. 고통의 근원에 애착을 갖게 하는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친족 간의 협력이 자신과 유사한 유전자가 확산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친족간의 애착의 원인이 고작 유전자 때문이라니. 나는 믿을 수 없다. 유전자가 아닐 것이다. 유전자 따위는 유전자 따위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내가 미워해야만 할 대상을 좋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분명 인류에겐, 우리에겐, 나에겐, 아니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에게 그런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이렇게 슬프게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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