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더의 다양한 변주

브로맨스는 브라더(brother)와 로맨스(romance)를 합친 신조어로, 남성 간의 애틋한 감정 또는 관계를 뜻한다. 여기서 나는 브로맨스라 함은 과연 어떤 것인가에 관해서 질문을 던지고 싶다. 흔히들 브로맨스라 함은 동성간의 사랑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 주변 사람들한테 브로맨스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연상되는지를 물어본 적이 있다. 대부분 처음 떠오른 생각은 ‘동성애 아니냐’는 대답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브로맨스를 의미함에 있어 ‘브라더’ 즉, 피를 나눈 ‘형제애’라는 단어를 먼저 내세우고 싶다. 이성간의 교제를 하다보면 아무리 깊은 관계라 할지라도 이성보다도 동성끼리 더 소통이 잘되는 이야기코드가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적 울타리 안에서 남성으로서 살아오며 헤쳐 온 수많은 고난과 역경들이 남성과 남성, 즉 동성은 이성 관계와 달리 말하지 않아도 사회적 유대관계를 통하여 느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즉, 백언불여일행(百言不如一行), 백마디 말보다 한 번의 실천이 더 중요하듯이 남성으로서 살아오며 숱한 사회적 경험을 헤쳐 온 남성이 남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가슴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또한 이 소통이 되는 이야기소재라는 것은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며 성적인 농도 짙은 농담 같은 이야기 소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으로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모든 소통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결혼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잉꼬부부라 할지라도 남편은 자신이 남성으로 살아가며 사회로부터 받은 억압을 소통함에 있어 부인보다도 친구, 스승, 상사, 동료 등을 찾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부인이 소통의 대상이 되지 못해서가 아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함에 있어 같은 남성으로서 살아오며 숱한 사회적 경험을 한 동질의 남성이 유대관계가 더 깊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남성’을 넘어 ‘피를 나눈 형제’라는 말도 더하고 싶다. 형제라 함은 피라는 성질을 나눈 남성들이다. 피라는 것은 가족관계를 뜻할 수도 있으나, 필자는 앞서 칼럼에서도 가족이라 함은 ‘동반자로서의 여정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친 후에야 형성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물론 이것은 나만의 생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것도 내 생각에 비추어본다면 똑같은 공식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즉, 형제라 함은 같은 남성으로서 동반자라는 여정의 통과의례를 거친 둘 이상의 관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반자로서의 여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브로맨스는 이성간의 ‘사랑’ 보다도 남성적 사회적 동질감으로 얻어지는 유대관계와 남성으로서, 동반자로서의 여정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친 후에 형성되는 진한 형재애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브로맨스’ 하여금 이것은 혈연 그 이상의 형재애로 아니면 동성애로, 동료애로 확장될 수 있다. 


  최근에 필자는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하는 M.Butterfly를 본 적이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르네 갈리마르는 오페라 나비 부인의 여주인공 ‘송 릴링’의 도도하며 우아한 자태에 매료되고 ‘송’과의 만남이 계속 될수록 동양 여성의 신비로움에 빠져들며 그녀와의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 사랑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르네 갈리마르는 송 릴링이 스파이로서 여성으로 변장한 남성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송 릴링에 대한 사랑은 멈추지 못하고 결국 자살의 길에 이르게 된다. 


뮤지컬 [M.Butterfly] 공연사진


  관객들은 이 작품을 보며 르네갈리마르의 사랑을 하나같이 응원했다. 그 이유가 과연 동성애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이 둘을 이렇게 만든 슬픈 사회적 관계 때문이었을까?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할 수 있겠다.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는 관객이 르네갈리마르를 응원하게 된 이유는 르네 갈리마르라는 남성에게 있어 송 릴링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남성만의 깊은 고독을 남성으로서 공유할 수 있으며 여성의 역할까지도 할 수 있는 완벽에 가까운 연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 속에서도 르네갈리마르는 송 릴링에게 여성과 얘기하는 듯한 은밀한 이야기 소재에서부터 남성들이 겪는 사회가 요구하는 명예욕에 대한 이야기 소재 등 모든 것을 소통한다. 이것을 완벽에 가까운 사랑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필자는 이것 또한 ‘브로맨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즉, 브로맨스라 함은  동료애, 형제애, 동성애로 모두 확장될 수 있으며 사회적 울타리 안에서 같은 남성으로서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헤쳐 온 여정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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