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4.08.18 역사 속 남자의 질투
  2. 2014.08.18 질투, 우리의 삶과도 맞닿아 있는 그것, 뮤지컬 <살리에르>
  3. 2014.08.11 너무나 인각적인, 여자의 질투 (1)

역사 속 남자의 질투

질투는 여자의 전유물처럼 여기지는 시대가 있었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암투를 그린 드라마나 영화에서 질투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졌다. 실제로 역사 속에 등장하는 많은 여인들은 자신의 지위를 넘보는 수많은 여인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한 암중모색은 단지 여인의 질투심 때문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과거의 역사는 남자들의 역사로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그늘 아래 살아가야 했기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여자는 여자를 견제하여야 했다. 견제의 결과적 단어가 바로 질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질투라는 단어 속에는 복잡한 심리적, 사회적 기제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여자의 질투보다 무서운 것이 남자의 질투다. 여자의 질투가 애달픈 면이 있다면 남자의 질투는 파괴적 면이 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의 질투는 종종 자신의 운명뿐만이 아니라 국가의 운명까지도 부숴버린다.

 

 

마케도니아의 왕이자,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켜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는 자신의 부하에 대한 질투심이 몹시 강했다. 전술에 뛰어나다는 이유로 페르디카스를 질투했고, 통술에 재능이 있다며 류시마코스를 질투했다. 마오쩌둥은 류사오치를 스탈린은 투하체프시키를 질투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천재적인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질투했다. 두 사람은 18894월생으로 오스트리아 린츠의 국립실업학교 레알슐레의 남학생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히틀러는 저서 <나의 투쟁>에서 자신이 지독하게 유대인을 혐오하게 된 원인에 대해 어린 시절 만난 유대인 학생을 언급했는데, 그 유대인 학생이 바로 비트겐슈타인이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비트겐슈타인은 부유한 유태인 가정에서 자랐다. 철제를 생산하는 사업을 하는 그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유태인 공업 대표였다. 반면 히틀러의 아버지는 나중에 작은 관리가 되었지만 원래는 글도 모르는 농부였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하녀였다. 히틀러는 자신의 출생에 열등감을 느꼈고 부유한 유태인 가정을 심하게 질투했다. 히틀러는 비트겐슈타인이 가진 부유한 가정환경과 그의 재능을 시기했고 이러한 감정이 모든 유태인들에 대한 증오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중학교 시절, 히틀러는 급진적인 반유대주의자가 되었다.

자신의 운명뿐만이 아니라 한 나라의 운명까지도 바꾼 남자들의 질투가 비단 외국의 사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돈에 대한 공민왕의 질투, 이순신에 대한 원균의 질투, 정약용에 대한 서용보의 질투,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질투까지... 남자의 질투는 가히 무시무시하다.

 

 


마지막까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은 남자의 자존심이라는 말이 있는 것은 질투가 바로 남자의 자존심과 같은 연장선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자존심질투때문에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이 탄생한 것을 알고 있는가? 프랑스 왕권이 최고조였던 시절 태양왕 루이 14세는 재무대신 푸케의 집에 초대된다. 그 집의 이름이 보르비콩트 성이다. 왕을 맞이하는 융단처럼 깔린 잔디, 조각상, 분수, 정원 내 운하에 떠 있는 배에서 연주되는 음악, 불꽃놀이... 이런 융숭한 대접에 루이 14세는 감동을 받기는커녕 자존심이 상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루이 14세는 왕실 재산 횡령죄로 푸케에게 종신형을 내리고 철가면을 씌워 평생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게 한다. 보르비콩트 성은 국고로 몰수 되었고, 그곳을 지은 세 명의 예술가들을 데려온 루이 14세는 보르비콩트의 화려함을 훨씬 능가하는 궁을 짓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베르사유다. 하지만 이 베르사유를 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이 궁전에서 벌어진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스런 행동이 훗날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만약 루이 14세가 푸케의 보르비콩트 성을 질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우리가 기억하는 세계사는 어쩌면 남자들의 물불 안 가리는 질투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참고서적

: <질투의 세계사>, 야마우치 마사유키, 이너북

: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 킴벌리 코니시, 그린비 출판사

: <세계 역사, 숨겨진 비밀을 밝히다>, 장장련·장영진, 눈과 마음

: <파리, 에스파스>, 김면, 허밍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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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우리의 삶과도 맞닿아 있는 그것, 뮤지컬 <살리에르>

뮤지컬 <살리에르>에서 살리에르는 엄청난 노력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궁정악장의 위치에 오른 음악가다. 그는 천재성을 가진 모차르트의 음악성을 시기하고 그의 음악을 훔치기에 이른다. 그리고 또 다른 나 젤라스를 통해 모차르트에게 독약을 먹여 함께 파멸해간다.

 



질투란 욕심의 한 단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질투와 욕심이란 감정은 나의 시야를 흐리게 해 자신에게 집중할 시간과 감정을 빼앗는다. 본래의 내가 갈 길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뮤지컬 속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자신만의 음악 색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노력했으면 어땠을까? 악성 베토벤처럼 살리에르도 질투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만의 길을 갔더라면 뭔가 다른 성과가 나오지는 않았을까?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때로는 양날의 검이 된다고 여겨진다. 남보다 앞서기 위해 노력하는 이는 그만큼 많이 갖게 되고, 더 많은 성과를 이뤄내곤 한다. 그리고 마음이 몹시 괴롭다. 자기는 아직 그처럼 갖지 못했다, 자신은 아직 부족하다, 끊임없는 박탈감에 시달린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질투를 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일에 있어서,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도 질투를 하며, 상처입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도 되고, 사랑을 잃기도, 찾기도 한다. 질투란 감정은 본능적인 것이기에 더욱 헤어 나오기가 힘든지도 모른다.

 

뮤지컬 살리에르는 살리에르와 모차르트의 선율 속에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는 질투의 감정들을 녹아냈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노쇠한 살리에르와는 달리 진지하고 젊은 캐릭터의 살리에르는 신선함을 주고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시선의 살리에르를 보는 재미를 준다.

 



희곡, 영화에 이어 뮤지컬로까지 재탄생된 질투의 화신 살리에르는 젤라스의 등장으로 질투의 감정이 더욱 폭발한다. 살리에르는 젤라스를 부정하지만 결국 그도 또한 자기 자신이다.

가장 나다운 나, 그 본연의 자신을 발견하고 이 세상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는 기쁨은 인생의 보람된 수확이 아닐까? 모두에게 인생은 쉽지 않은 것이다. 뮤지컬 속 살리에르가 자기 본연의 음악에 집중하려 애썼다면 어쩌면 그의 음악은 모차르트의 것만큼 사랑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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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인각적인, 여자의 질투

질투. 미워하고 샘내는 마음. 인간이 느끼는 오만가지 감정 중에 가장 매력적인 감정.

질투는 상대를 두고 벌어지는 의미심장한 스토리를 지닌다는 점에서, 지극한 자기애를 근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인간적이다.

 

얼마 전 다섯 살 난 딸애가 이런 말을 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애가 다른 애 그네를 밀어주는 걸 보는 순간 온 몸이 매운 느낌이 나면서 그 둘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처럼 느껴졌다고. 그리고 자기 자신이 가여워서 위로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단다. 질투다. 딸애는 지금도 그 어느 때보다 맵고 가여운 질투의 화염에 불타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 할머니도 끙끙 앓아누우셨던 적이 있었다. 몸이 불편하신건지, 자식들에게 서운한 것이 있으셨던 건지 우리 모두 머리를 모아 봐도 뾰족한 수가 없었는데, 어느 점잖고 기품 있어 보이는 할아버지의 병문안으로 모든 의혹이 풀렸다. 노인대학 공식지정 커플이셨던 할아버지께서 어느 새로운 할머니를 자전거에 몇 차례 태워드렸단다. 이를 본 우리 할머니께서 얌전한 체면에 드러내놓고는 질투를 할 수 없어 혼자 가슴앓이를 하다가 그만 몸져누우셨던 것이다. 5살 아이든 여든 넘은 노인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이성이 다른 이성을 좋아하거나 호의적인 태도로 대할 때 느끼는 미움과 분노는 크게 다르지 않다. 속에서 치미는 못마땅함을 넘어서 온 몸의 세포가 한 번에 비명을 지르며 자연발화 할 것만 같은 그런 느낌.

그러기에 남녀노소,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인간의 본능으로서 질투는 인간이 지닌 감정 중 가장 짠하고도 솔직한 얼굴을 가졌다. 드러내거나 들켜선 안 된다는 것 또한 질투라는 감정의 얄궂은 옵션이다

 

 

 

 이성으로 인한 질투는 그나마 로맨틱하기라도 하지.

잘나거나 앞선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질투는 좀 더 괴로운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그런 질투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는데 시작은 임산부 요가교실에서부터였다. 주먹 크기도 안 되는 태아의 심장 소리며 성별, 미세한 움직임 등도 우리에겐 부러워하거나 우쭐할 조건이 되었고, 튼살 마사지 크림이나 각종 신생아용품, 제대혈 은행 보증금 규모 등으로도 서로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곤 했었다.

조리원에서도 산후마사지 프로그램 등급에 따라 서로를 보는 눈길이 달랐으며, 보모를 쓰는 문제에 있어서도 조선족이냐 순수 한국인이냐 혹은 영어권 나라의 학습 튜터까지 가능한 보모냐를 두고 여자들의 눈치전쟁은 심각했다.

여자의 질투는 그 대상도 참으로 폭이 넓다.

옆집에서 쓰는 치약에 대한 호기심에서부터 헐리우드의 엄청난 상속녀의 라이프 스타일까지. 여자의 질투에 동네 마트 전단부터 백화점 쇼윈도 마네킹 스타일이 결정된다.

요즘은 워킹맘을 의도적으로 따돌리려는 전업맘들의 질투가 최고인 것 같다고 느낀다. 유치원 담임선생님의 신상과 기호에 관한 정보부터 좋은 과외 선생 연락처까지. 워킹맘들은 감히 엄두도 못낼 전업맘들만의 승전물이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게 당연하다는 그들의 논리는 사실 잘 가꿔진 워킹맘들의 외모와 커리어, 연봉 및 외식 패턴에 대한 질투에 불과한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나는 전업맘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질투는 온종일 목 늘어난 티셔츠 바람으로 아이와 함께 종종걸음치는 그녀들의 수고에 기반한 것이며, 그것은 분명 자각치 못하는 자기애에서 출발한다. 다만 그녀들은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피할 논리가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질투는 사랑이나 희생 등과 같은 아름다운 가치를 지니는 감정처럼 예쁘게 생기지 않았다. 그 모양새가 울뚝불뚝하고 성기며 거칠기 그지없기에 모두가 질투하는 모습에 야박하게 군다. 그러나 질투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더 우리 모두는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질투에 야박한건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질투라는 것은 들키거나 드러났을 때, 인격적인 문제로까지 연결되는 터라 우리는 그것을 치열하게 감추거나 지나치게 억누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살리에르를 보라. 그는 당대에 나름 훌륭한 음악가였음에도 그의 연관검색어에는 살리에르 증후군이 더 호응을 얻는다. 주변의 뛰어난 인물 때문에 느끼는 열등감, 시기, 질투심 등의 증상이 그렇다는데 그것이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어디 살리에르만의 문제였겠는가.

질투는 누구의 잘못으로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바람에 재채기가 나고 너무 찬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나는 것처럼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우리에게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감정이다.

열등감을 동반하는 질투, 수치심이라는 머리로 시작해 죄책감이라는 꼬리로 마무리 짓는 질투, 인격적 수양이 덜 되어 생기는 감정이라는 도덕적 압박에 시달리는 질투.

질투한다고 장희빈처럼 사약이 든 약사발이 들이밀어지진 않을 것이다.

오늘은 우리 맘껏 질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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